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에 기초한 존 넬슨 다비의 구원론!
당신이 받은 구원은 과연 영광스러운가?
오늘날 성경적인 구원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나름대로의 다양한 견해와 이견(異見)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복음」, 「사영리의 복음」, 「거듭남과 죄 사함의 복음」 등 다양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모두가 「성화를 동반하지 않는 구원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쨌든 당신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다. 자, 당신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당신에겐 무엇이 변했는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믿었고, 누구를 영접한 것인가? 바로 「성화 없는 구원」이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 있는 예수」이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보자. 나의 삶 속에 성화의 싹이 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거룩한 인격을 향한 한 발자국을 떼었는가? 나의 구원은 과연 영광스러운가?
목차
엮은이 서문
제1부, 거듭남의 진리
제1장,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제2장, 생명과 영생
제3장, 성경이 말하는 회개
제2부, 죄 사함의 진리
제4장,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제5장 현재적 죄 사함, 영원한 죄 사함, 그리고 통치적 죄 사함
제6장, 죄 사함과 영적 자유
제7장, 죄 사함과 구원
제8장, 칭의와 하나님의 의
제3부, 영적 해방의 진리
제9장, 영적 해방이란 무엇인가?
제10장, 율법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제11장,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제12장, 성결과 영적 해방
제4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
제13장,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무엇인가?
제14장,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음
존 넬슨 다비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일컫어지는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계로 1800년 11월 18일 리프 캐슬, 킹스 타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일랜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잠시 봉직하다가 1825년에 영국 국교회의 부제로, 그 이듬해에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다비는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당시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신부직을 1827년에 사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벨렛(J. G. Bellett), 허친슨(F. Hutchinson), 파넬(Lord Congleton-John Parnell), 그로브스(A. N. Groves), 크로닌(E. Cronin), 스토크스(W. J. Stokes) 등 6명의 신앙동지와 함께 성만찬을 시작함으로써 기성 교계와 결백했다. 이들을 가리켜 세칭 ‘더블린의 7형제’란 부르며, 교회 역사상 ‘형제 교회’의 시발점이 된다. 이들은 교파나 사회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토대로 하여 형제와 자매로 영접되었기 때문에 플리머스 형제 교회(Plymouth Brethren Assembly)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채프만(R. C. Chapman)이 반스테플에서, 크레익과 조지 뮬러가 브리스톨ㄹ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뉴톤의 매부이며 저명한 본문 비평가였던 트레겔레스(S. P. Tregelles)가 1836년에 영접되었다. 다비는 그리스도인의 간증(The Christian witness)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고, 1837년에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1840년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다. 다비의 성경주석(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도 이 무렵 출간되었는데 5권으로 되어있는 이 저서야 말로 성경학자들에 의해 극찬을 받고 있는 불후의 걸작이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 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유럽 각국어에도 유창해서 그가 번역한 불어 성경은 프랑스 전역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새번역으로 불리는 그의 영어성경은 원어에 충실하기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밖에도 독일어, 이태리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논문과 설교는 윌리암 켈리(W. Kelly)가 편집하여 32권으로 집대성했다. 만년에는 유럽 전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서인도제도, 뉴질랜드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영감이 넘치는 찬송을 수없이 작사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위해 드려진 삶이었다. 1882년 4월 29일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안식과 상급을 주실 주님께로 갔다.